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문산 전투 (문단 편집) === 중공군 5월 공세 분쇄: 파로호 전투, 취봉~643고지 전투 === 6사단이 지암리를 향한 공격을 시작한 23일 오전부터 중동부전선의 미 10군단과 동부전선의 한국군 [[제1군단|1군단]]도 반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의 한국군 [[제3군단|3군단]] 전선 돌파로 형성된 돌출부 기저를 차단함으로써 [[홍천군|홍천]]과 [[인제군|인제]]까지 뚫고 내려온 중공군 주공을 포위섬멸하려는 의도였다. 미 10군단은 미 9군단이 지암리에서 운용한 것과 유사한 전차와 차량 탑승 보병 위주의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화천군|화천]]과 [[양구군|양구]]로 돌진시켰고, 그 결과 양구 일대의 중공군 동쪽 퇴로가 차단되었다. 지암리에서 포위섬멸전이 한창이던 25일부터 26일 사이 동부전선 돌파구에 몰려 있던 5~6개 군단 규모의 중공군 주력도 시시각각 조여오는 유엔군의 포위망을 깨닫고 오음리-화천발전소(구만리 발전소) 통로를 향해 모여들었다. 보병 위주로 별도의 도하장비를 보유하지 못한 중공군에게는 수심이 깊고 동서 길이만 21km, 남북 폭이 1km에 이르는 [[파로호]](당시엔 화천저수지로 불렸다)를 맨몸으로 도하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천댐을 경유하는 통로만이 중공군 2개 병단의 유일한 탈출로였다. 지암리 일대에서 포위망을 전개하고 있던 6사단이 임무 전환을 지시받은 것도 이 시점이었다. 포위망에 19연대와 2연대 2대대를 잔류시켜 적 63군 섬멸을 속행토록 한 후 사단 본대는 26일부터 춘천 북방으로 신속히 이동, 화천발전소와 그 남쪽 매봉(매봉산)을 다시 점령[* 사실 이곳은 이미 4월에 점령한 곳인데, 정확히는 정탐을 나간 [[KLO]]가 포대와 전차 위치를 알려 이를 폭격으로 제거해도 다음날이면 또 모습을 드러내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중공군으로 위장한 인민군 출신 오죽송이 살펴보니 전나무를 깎아 그럴듯하게 칠한 가짜여서 4월 18일 7연대가 돌격해 점령했다가 [[사창리 전투]]로 화천 이남으로 패주하는 과정에서 잃었었다.]함으로써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이었다. 중부전선의 중공군 조공을 격파한 6사단이 이젠 동부전선의 중공군 주공을 섬멸할 전면 반격의 최선봉이 된 것이다. 사단 주공을 맡은 부대는 2연대였고, 2연대의 주공은 353고지에서 사투를 벌인 3대대였다. 27일 아침부터 험악한 산악지형을 타고 침투 공격을 시작한 2연대 3대대는 오후 늦게 중간 경유지점인 용화산을 탈취한 다음, 특별한 적정이 관측되지 않자 저녁 7시 매봉을 향해 야간행군을 개시했다. 여기에서 3대대의 행군로로는 일반적인 능선이나 평지 대신 8부 능선이 선택됐는데, 이는 평지는 너무 멀리 돌아가는 길이고 능선은 중공군에게 부대가 노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3대대가 험악한 산악지형 8부 능선을 따라 전진하기 위해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노새를 분대 단위로 지급, 운용하면서 전력을 기울인 보람이 있어 오후 11시경 매봉이 탈환됐다. 28일에는 주간에 퇴각하는 수천명 단위의 적 부대를 향해 공습을 유도하는 등 공격기회를 노리던 3대대는 29일 새벽 은밀하게 공격을 재개해 화천발전소를 점령하고 461번 도로를 차단, 화천 일대의 통로를 봉쇄함으로써 임무를 완수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이 황급히 버리고 간 트럭 수십대 분량의 막대한 보급물자가 노획됐다. 다만 원래 미 8군 목표이던 적 철수부대는 6사단이 공격을 개시한 27일 시점에서 이미 화천발전소 통로를 통해 빠져나간 뒤였다는 사실이 후일 밝혀졌다. 또한 이 와중에 패주와 철수 행렬을 엄호하기 위해 새로운 부대가 출몰했는데, 전후 공개된 중공측 기록에 따르면 20군 예하 58사단이 27일 화천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한편 패주중인 중공군들은 여전히 달아나기에 급급해 낙오병과 패잔병이 연이어 발생했으며, 이 와중에도 상당수가 미 공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거나 파로호를 무리하게 헤엄쳐 건너려다 익사했다. 게다가 전투가 끝나고 며칠 후인 6월 2일부터 파로호에 가라앉았던 중공군 사체들이 부패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시체가 너무 많아 별도의 인력을 동원해 수거하고 나서야 식수로 이용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한편 이 와중에 최후미로 대기중인 중공군 제20군(예하 58, 60,[* [[사창리 전투]]의 굴욕을 안겨준 그 사단이다.] 151사단)이 화천댐 서쪽 대이리의 643고지(수리봉[* 신읍리의 수리봉과는 이름만 같다.])를 기습 점령 후 [[알박기]]를 시작했고, 이에 6월 3일부터 5일까지 미 제17연대가 항공지원을 받으며 탈환 작전을 실시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이후 국군 6사단 7연대가 6일부터 취봉과 643고지군을 향해 포위 공격을 감행,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점령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중공군이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달성하고자 전력을 기울인 마지막 시도였던 5월 공세가 완전히 끝났다. 이후 중공군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포기하고 유엔군의 반격으로 형성된 전선을 조금씩 밀고 당길 뿐인 [[고지전|고지쟁탈전]]으로 일관했으며, 그나마 전선의 위치조차 중공군이 4월 공세를 시작하기 이전 시점과 거의 비슷했다. 4월, 5월 공세에서 중공군은 수많은 목숨을 잃고도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특히 홍콩에서 1968년 발간된 중공군인지(中共軍人誌)는 5월 공세 당시 중공군이 입은 손실을 사상 10만, 포로 1만으로 추정했으며, 2000년 중국 군사과학원이 발간한 공간전사 중 하나인 '항미원조전쟁사'는 5월 전역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의 손실을 8만 5000명 수준으로 기록했다. 홍콩 언론이 추정한 10만여명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육박하는 대규모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중국측도 인정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중공군 입장에선 20군을 내려보내 엄호를 해주며 643고지 알박기 등으로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패주중인 2개 병단, 10만~20만명은 통째로 화천 저수지 이남에서 포위섬멸당해 동부전선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1951년 6월 23일, 소련 유엔 대표 야코프 말리크는 "소련은 한국에서의 무력충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며 휴전 혹은 정전 회담을 제안했다. 이는 교전 당사자인 중국과 북한의 공식 휴전 회담 제의나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애초에 북한의 남침을 허락하고 계획하여 무기를 제공했으며, 무엇보다 중국과 북한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주의권 최고의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5월 공세를 분쇄하고 반격에 성공한 직후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이 미 합참에 "(이번) 유엔군의 승리가 적을 휴전 협상의 무대로 불러 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고한 그대로였다. 화천 추격전은 용문산 전투로 5월 공세를 맞닥뜨린 6사단이 그 5월 공세의 [[피날레]]로 벌인 전투라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전투사 용문산 전투 편에서처럼 용문산 방어전, 지암리 포위전과 함께 묶어 서술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해서는 중공군 조공을 격퇴 및 섬멸한 뒤 그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화천 저수지에서 따로 패퇴중인 적 주공을 차단하려 시도한 별개의 전투다. 따라서 명칭도 화천 추격전, 화천발전소 전투, 파로호 전투 등으로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